晦齋李先生行狀」에서 보이듯이 퇴계 선생은 회재의 논변의 공로가 異端의 邪說을 물리치고 吾道의 本源을 천명한 데 있다고 칭송하고 그에게 立言垂後의 공이 있다고 하였다. 『退溪集』 卷 49, 「晦齋李先生行狀」
물론, 율곡의 회재에 대한 평가 등과 같이 회재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있으나 그
1. 생애 및 저서
이언적(1491-1553)은 조선시대 전기의 철학자로 본관은 여주이고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이며 자는 복고(復古)이고 이름 적이다. 시호는 문원(文元)이고, 원래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령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그는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2세 때부터는 외숙인 손
晦齋; 어두운 집)’이다. 이는 주희의 호가 ‘회암(晦菴; 어두운 집)’인 것에 따른 것이다. 주희의 이 호는 “땅 속은 어둡지만, 그곳에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가 밝은 세상에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뜻이다.
32세 - 세자를 가르침, 33세 - 성균관의 전적(典籍), 인동(仁同) 현감, 춘추관(春秋館) 기사관
노계 박인로논
1. 노계의 문학사적 위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는 조선시대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의 4대에 걸쳐서 생존했던 문인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 시대의 역사를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해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박인로는 조선 시대 전기에서
조선의 성리학은 여건이 중국의 성리학 발흥기와 비슷했던 麗末鮮初에 싹터 중국의 성리학과 비슷한 기능을 행하게 된다. 고려말기에는 귀족의 대토지 소유확대로 인해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고 있었는데 이들 소수 귀족들은 元이라는 대외세력을 업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내정의 개혁만으로는 이 문제
구인록 求仁錄》(1550)
《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
《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
《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세상의 근본은 임금에게 있고, 임금의 도는 마음에 있으며, 마음의 방법은 인의에 있다. 그 길은 지극히 가까워서 멀지 않으며, 그 방법은 지극히 간단해서 복잡하
Ⅰ. 주자학(성리학)의 전파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Ⅰ. 유학의 의의
고대사로부터 고려시기까지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역사의 발전단계의 고비마다 유학은 불교․도교․토착적 요소와 더불어 역사가 요구하는 이론과 이념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진 중국역사에서 앞서 체험하고 학문적으로 심화된 이론과 내용으로 유학이 성숙된 세련
Ⅰ. 서론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시기를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이것이 중국 宋에서 발흥할 무렵, 즉 고려 仁宗(인종)대를 전후한 시기(11~12세기)부터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의 서적을 빈번하게 수집해 들였고, 외교경로를 통해서 윤언이와 같은 대학자가 송에